내일의 눈
미국은 한때 반독점법 선도국이었다
“내용 중에 공정한 내용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나.”(김정관 산업부 장관)
불공정한 한미 관세협상 ‘조인트 팩트시트(공동설명자료)’ 중에서도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서 미국 기업이 차별받지 않도록 보장한다’는 조항이다.
문구 자체는 포괄적 원칙에 가깝다. 하지만 협상과정을 추론하면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플랫폼(반독점)법 등을 지목하는 것으로 읽힌다. 미국은 이미 재계와 정치권 등을 통해 한국의 플랫폼법 제정 노력에 우려를 표명해왔다. 이번엔 아예 관세협상 결과를 담은 문서에 이 내용을 못 박았다.
이런 행위는 한국 국회와 국민이 결정해야 할 법령제정 권한에 제동을 걸겠다는 미국의 의지표명으로 보인다. 강대국의 폭압이고 국제법을 위반한 내정간섭이다.
또 다른 문제는 미국측 주장이 사실이 아니란 점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플랫폼법은 미국은 물론 어느 특정국의 기업도 차별하지 않는다.
플랫폼법은 특정규모 이상의 플랫폼업체가 4대 반칙행위를 했을 때 규제하는 법안이다. 4대 반칙행위는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최혜대우 요구 등이다. 이미 시장을 장악한 공룡플랫폼업체가 다른 업체의 시장진입을 막거나 소비자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할 때 제재를 받게 된다. 플랫폼업 특성상 규제 대상 기업과 행위를 명확히 한 것이 기존 반독점(공정거래)법과 다른 점이다.
기존 법률로는 최종 제재(조사~대법원 판결)까지 2~3년은 족히 걸린다. 하지만 플랫폼 업계에서 2~3년이면 시장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이런 식으론 제재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그래서 조사와 제재, 판결에 걸리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규제대상과 행위를 명확히 했다. 이런 플랫폼법에 무슨 ‘국가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다만 미국은 IT와 플랫폼 초강국이어서 규제대상 기업이 많을 수는 있다. 다들 아는 애플·구글·MS·아마존이 대표적 미국 플랫폼 기업이다. 하지만 제재는 다른 문제다. 이들 기업이 한국시장에서 4대 반칙행위를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혹시라도 이 법을 막겠다는 미국기업과 미국정부는 한국 시장에서 위법행위를 하면서 돈을 벌겠다는 심산인지 궁금하다.
1890년 세계 최초 반독점법인 셔먼법을 제정한 미국은 경쟁법(반독점법)의 산 역사다. 한국과 유럽, 일본도 미국의 사례와 역사를 공부해 경쟁법을 발전시켰다. 지금도 미국 의회는 플랫폼 독점 폐해를 막기 위한 반독점법을 논의 중이다. 자국의 플랫폼 독점폐해를 막기 위한 입법은 추진하면서, 약소국엔 법도 만들지 못하게 팔을 비트는 꼴이다. 이런 미국이 세계평화니 국제인권이니 떠들 자격이나 있을까. 국제사회에서 진짜 ‘리더십’은 호혜평등과 개발도상국에 대한 관용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