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경기 부양’의 사생아, 좀비경제

2025-11-26 13:00:04 게재

‘경제불황’이 없는 세상은 낙원일까? 경영위기를 겪는 기업들에 정부와 은행이 지원을 제공해 부도를 면하게 해주는 건 잘하는 일일까? “그렇다”는 답이 당연해 보이는 두 가지 질문을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신호에서 다뤘다. “그렇지 않다”는 답변과 함께 왜 그런지를 조목조목 짚어낸 기사였다. ‘경기침체가 대단히 드물어져서, 골칫거리가 쌓이고 있다(Recessions have become ultra-rare. That is storing up trouble)’가 기사 제목이다.

이코노미스트는 2022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동안 세계경제가 평균 3%의 견실한 성장세를 보였고 올해도 3% 성장이 예상되는 상황을 예로 들었다. 전세계 부(富)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실업률이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고 세계 기업들의 지난 3분기 전년 동기대비 이익률(11%)은 3년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놀랍게도 이런 ‘최우등 성적표’는 주요국들의 고(高)금리와 은행 위기, 통상 분쟁과 유럽-중동에서의 전쟁 등 여러 악재 속에서 나왔다. 각국 정부가 경기불황을 막기 위해 재정과 세제, 금융 등 정책수단을 총동원해 개입에 나선 덕분이다.

진보성향인 이 매체가 주요국들이 악재를 딛고 경기를 방어하는데 성공한 것을 축하하는 대신 ‘걱정거리’로 다룬 데는 이유가 있다. 자연스런 경기순환을 인위적으로 거스름에 따라 시장이 왜곡되고 경제주체들의 체질까지 허약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경제 전체가 ‘고인 물’ 상태에 빠져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꼽은 ‘창조적 파괴’와 혁신이 불가능해진다.

슘페터는 “경기가 불황에 접어들면 경쟁력을 잃은 기업들이 도태되고, 소속 근로자들이 보다 생산성 높은 업종으로 옮겨가면서 경제에 새 활력이 생겨난다”며 “창조적 파괴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경기불황은 단기적으로는 고통스럽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득”이라고 말했다.

한계기업 퇴출로 0.4~0.5% 성장 가능

이코노미스트의 진단은 최근 한국은행이 내놓은 보고서와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한은은 지난 12일 ‘경제위기 이후 우리 성장은 왜 구조적으로 낮아졌는가’ 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이자도 갚지 못해 부도 위험이 큰 한계기업들이 제대로 퇴출됐더라면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이 0.4~0.5% 성장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은이 조사한 결과 ‘퇴출 고위험(5년 연속 영업손실, 자본잠식률 50% 이상 등 재무구조가 심각하게 악화)’ 기업은 2014~2019년 약 4%였지만 실제 퇴출된 기업은 2%에 그쳤고, 코로나19 대유행 이후인 2022~2024년에는 그 비율이 3.8%였지만 실제 퇴출된 기업은 0.4%로 훨씬 더 줄어들었다. “퇴출 고위험 기업이 제대로 정리되고 정상 기업이 그 자리를 채웠다면 국내 투자는 2014~2019년 3.3%, 2022~2024년에는 2.8% 늘었을 것”이라는 게 한은의 추정이다. 투자 확대는 일자리 증가와 성장률 상승을 이끄는 핵심 요인이다.

보고서의 요지는 크게 두가지다. 위기를 맞았을 때 한계기업 퇴출이 지연되는 바람에 신생 기업이 들어오지 못하면서 경제 전체에 ‘고인 물’ 상태가 퍼졌고, 자금난에 빠진 퇴출고위험 기업들의 투자 회피로 경제 활력이 크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진 데는 정부와 정치권의 무분별한 부실기업 지원 등 시장개입 책임이 크다.

역대 정부와 정치권은 선거를 의식, ‘약자보호’ 명분 아래 더는 존립이 어려워진 ‘좀비’ 기업들에 회생가능성 여부를 따지지 않은 채 차입금 상환유예와 구제금융 정책을 남발했다. 인체와 마찬가지로 경제도 신진대사가 제대로 이뤄져야 하는데 눈앞의 표에 급급한 정책들이 누적되면서 우리 경제가 만성 골병을 앓게 됐다는 얘기다.

이코노미스트가 비교한 유럽과 미국의 불황대처 방식은 이런 점에서 교훈적이다. 유럽 주요국들은 2020년 코로나19가 확산하자 재정자금을 쏟아 부어 한계기업들의 일자리까지 지켜주는 정책을 취했다. 반면 미국은 부실기업들을 억지로 연명시키기 보다 실업 급여를 높이는 시장 친화적 조치로 대응했다.

이에 따라 코로나19시기 유럽의 실업률이 최고 8.6%에서 억제된 반면 미국은 한때 15%까지 치솟았지만 잠시뿐이었다. 미국은 퇴출기업들이 비운 자리에 인공지능(AI) 등 신산업 분야 기업들이 왕성하게 들어섰고, 2020~2022년 3년 간 신규 일자리가 유럽의 2배에 달했다. 뿐만 아니다. 2019년 이후 노동생산성 증가율도 10%를 기록하며 2%에 그친 유럽을 압도했다.

핵심분야 구조개혁이 잠재성장률 높여

이재명 대통령은 13일 참모회의에서 “핵심 분야 구조개혁을 통해 경제체질을 강화하고 잠재성장률을 반드시 반등시켜야 한다”며 “내년이 국가대전환의 출발점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 대통령은 “구조개혁에는 고통이 따르기에 쉽지 않고, 저항도 따르지만 이겨내야 한다”고도 했다. 더 보탤 것 없이 핵심을 꿰뚫은 얘기다.

경제사회연구원 이사 전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