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탁 칼럼
‘서울 자가에 국회 다니는 의원님’의 인생 성적표
동창회 같은 모임에 도통 얼굴 안 내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주변에 살가운 인사를 건넬 때가 있다. 그가 중년을 넘어선 나이라면 십중팔구 선거 출마 아니면 자녀 결혼이다. 그런데 선거 출마는 드물 수밖에 없으니 대부분 혼사를 염두에 둔 경우다.
한국의 부모는 자녀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가 다가오면 몸과 마음이 자유로울 수 없다. 겉으로는 좋은 짝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면 그만이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혼사 이벤트에 온통 신경 곤두세우는 게 일반적이다.
당장 지인들 중 어느 선까지 청첩장을 돌려야 욕 안 먹으면서 축하는 최대치로 받을 수 있을지 헤아리는 게 쉽지 않다. 또 예식에 참석하는 하객 행렬이 사돈네에 비해 너무 기울지는 않을지, 식장 좌우에 세워둘 축하화환이 혼주 체면 세워줄 정도는 될지, 피로연 식사는 몇명분을 준비해야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을지, 어쩔 수 없이 챙겨야 하는 사안이 한 둘이 아니다.
여기에 그동안 자신이 뿌린 부조금을 어림잡아 보고 과연 그에 비례해 축의금이 얼마나 들어올지 예상해 보는 내밀한 관심사까지, 입 밖에 내기는 부끄럽지만 마음까지 초연하기는 어려운 현실적 고민 포인트가 적지 않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이 아니어도 자식의 혼인이 인생 성적표라고 믿는 부모들이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많다. 이들은 하객 인파와 화환 개수에 따라 A에서 F까지 성적 등급이 매겨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왕이면 현직에 있을 때 자식이 결혼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젊은 자식은 이해할 수도 없고 동의하지도 않지만, 현직일 때와 퇴직하고 난 뒤 치르는 혼사와 그 축의금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걸 경험으로 안다. 법원에서도 결혼식 축의금은 혼인 당사자가 아닌 부모에 귀속된다고 판단한다. 결혼이 신랑신부의 대사(大事)라면 결혼식(式)은 혼주의 대사(大事)라는 걸 사회적으로 인정해주는 셈이다.
정치인 부조금 '주지는 않고 받기만'
문제는 민간인 사이의 이런 부조문화가 정치인들에게는 편향적으로 열려있다는 점이다. 현재 공직선거법상 정치인은 지역구 유권자의 경조사가 있을 때 부조금을 제공할 수 없게 돼 있다. 그런데 유권자는 해당 정치인 경조사에 금액 제한이 있을 뿐 부조금을 낼 수 있다. 정치인은 ‘주지는 않고 받기만’ 하는 것이다. 정치인을 포함해 공직자 등에 적용되는 청탁금지법에는 경조사비에 대해 직무관련성 없는 사람은 한번에 100만원, 직무관련성이 있는 경우엔 5만원까지 허용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한 사진기자의 특종 취재로 까발려진 국회 최민희 과방위원장의 문자 내역을 보면 이 같은 한도액이 현실에서 별 의미 없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과방위원장과의 직무관련성이 명백한 통신사 CEO가 버젓이 100만원 내는 판에 알량한 법 지킨다며 봉투에 달랑 5만원만 넣어갈 ‘간 큰’ 하객이 얼마나 되겠나. 그러니 정치인 경조사비는 음으로 양으로 수수 가능한 통로가 열려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최 의원이 유난히 여론의 질책을 받은 것은 상임위원장으로서 국정감사 기간 중 국회에서 딸 결혼식을 치르면서 피감기관의 화환과 축의금까지 마다하지 않은 지독한 도덕불감증을 보였기 때문일 뿐이다. 본질에서 유사한 사례는 예나 지금이나 흔하다. 2022년 신동근 민주당 의원은 장남의 결혼 소식을 지역구 유권자와 유관기관 관계자들에게 모바일 청첩장으로 알려 물의를 빚었고, 어기구 민주당 의원은 딸 결혼 청첩장을 지역구 주민 대부분에게 무차별 발송했다가 실수였다며 사과문자를 보냈다.
대통령실 우상호 정무수석도 최민희 의원 혼사 며칠 뒤 국회에서 아들 결혼식을 치르면서 수많은 화환과 길게 늘어선 축의금 행렬을 사양하지 않은 것으로 보도됐다.
정계에는 위법 소지가 있는 축의금을 받고도 신고하거나 돌려주는 관행이 없다.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전체 국회의원 중 최민희 의원처럼 축의금을 반환한 의원이 있다는 말을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대놓고 고함을 친다.
정치인 기득권 개혁은 언제쯤
사실 ‘최민희 사건’은 어느새 잠잠해졌다. 야당 고발에 따라 경찰이 수사에 나선다고 하지만 이런 사건 처리는 부지하세월이라는 걸 모두가 안다. 그 사이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이 공직자의 경조사비 수수행위를 제한하는 내용의 소위 ‘최민희 방지법’을 발의했지만 여야 어느 쪽도 진정성 있게 추진하는 기색이 없다. 국회 절대 의석을 가진 여당은 마음만 먹으면 전광석화처럼 처리할 수 있을 텐데 군색한 처지 때문인지 가타부타 말이 없다.
과거 김영호 민주당 의원도 “선거구민에게 경조사비를 줄 수 없다면 당연히 받지도 말아야 한다”는 취지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냈지만 본격 논의 과정도 없이 국회 임기가 만료되면서 자동폐기된 적이 있다. 정치인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개혁은 이번에도 그렇게 흐지부지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