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훈 칼럼

노벨과학상과 축적의 시간

2025-12-03 13:00:01 게재

올해의 노벨물리학상은 양자 터널링 현상을 초전도체 소자에서 최초로 보인 세 명의 물리학자에게 돌아갔다. 1984년 그들의 논문이 출판된 지 40년 만의 수상이다. 수상 배경에는 우선 초전도체라는 신기한 금속이 있다.

핸드폰이나 노트북컴퓨터는 오래 사용하면 뜨거워진다. 요즘 그 중요성이 부각되는 인공지능용 데이터센터는 어마어마한 전력을 소모하는 만큼 열도 많이 방출한다. 원인은 전선에 흐르는 전류가 만드는 열이다. 초전도체로 회로를 만들면 이런 뜨거움이 사라진다. 1911년부터 네덜란드의 카멜링 온네스의 실험실에서 처음 발견된 현상이다.

1925년 양자역학의 탄생과 함께 차츰 초전도체를 이해하는 올바른 시각은 거시 양자 현상이란 걸 알게 됐다. 양자역학은 원자처럼 작은 물질세계를 다루는 과학체계이고, 원자가 뭉쳐 점점 큰 물체를 만들수록 양자성은 희석된다.

초전도체는 예외였다. 일반 금속 대신 초전도체로 만든 전선은 양자역학적 특성을 여전히 간직한다. 가령 고리 모양의 전선에 전류가 시계방향으로 흐르면서 동시에 반시계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이른바 슈레딩거 고양이 상태가 초전도체 고리에서 구현된다.

이런 황당한 상황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려고 노력한 토니 레겟이란 이론물리학자가 있었다. 나중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만큼 탁월한 이론가였던 그의 제안을 무겁게 받아들인 물리학자들이 있었다. 레겟의 제안에 따르면 양자역학 고유의 특성이라고 할 ‘터널링’ 현상이 초전도체에서 일어나야 했다.

마침 초전도체를 잘 다루기로 유명한 버클리 대학의 존 클락 교수에게는 탁월한 연구원 미셀 드보레 박사와 뛰어난 대학원생 존 마티니스가 있었다. 세 명의 실험은 초전도체가 거시적 물체임에도 불구하고 양자적 특성을 잘 보인다는 점을 증명했다.

호기심이 쓸모 있는 기술이 되기까지

미셀 드보레는 나중에 미국 예일 대학 물리학과의 교수로서 수많은 제자를 키웠고, 그렇게 훈련받은 제자들은 IBM의 양자컴퓨터 개발의 주역이 됐다. 존 마티니스는 매력적인 미국 서부의 도시 산타바바라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 교수로서 제자를 키웠고 구글의 양자컴퓨터 개발에 합류해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의 공로와 인재 배출 덕분에 우리가 종종 언론에서 접하는 구글과 IBM의 양자컴퓨터 혁신이 가능했다. 1911년 네덜란드에서 출발한 여정은 이제 양자 컴퓨터란 혁명적 계산 기기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혹자는 이 한 세기 넘게 펼쳐진 아름다운 과학 여정 서사에서 ‘호기심에 기초한 순수 연구’의 중요성을 떠올릴 것이다. 틀린 시각은 아니지만 낭만적이다. 대부분의 호기심에 기반한 탐구는 시간과 함께 잊혀진다. 쓸모없기 때문이다. 모든 과학적 발견은 갓 태어났을 때는 쓸모없어 보이지만 그 중 일부는 탁월한 쓸모를 찾아낸다.

알프레드 노벨 역시 ‘인류에게 유익한' 과학적 진보를 이룬 자에게 상을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올해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이 보낸 지난 40년이란 세월은 그들의 발견이 품고 있는 쓸모 있음을 증명받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1917년 수학자 요한 라돈이 개발한 라돈 변환이란 수학적 기법이 있다. 수술을 앞둔 환자들이 한번쯤 해봤을 컴퓨터 단층촬영(CT) 기계가 있다. 일반적인 X-선 기계는 사람 몸 속의 모습을 2차원적 평면으로 그려낸다면 CT는 3차원적인 영상으로 재구성해내는 데 이 때 라돈 변환을 사용한다.

흥미로운 수학적 발견에 그칠 뻔했던 라돈 변환을 의학 기기에 접목해 단층 촬용을 가능하게 만든 두 과학자 하운스필드와 코맥은 1979년 노벨 생리학상을 받았다. 60년의 기다림과 노력 끝에 라돈의 수학적 발견은 그 쓸모를 찾았다. 호기심은 과학 지식이란 아이를 잉태하고 그 아이는 자라 쓸모있는 기술이 되어 인간 세상을 바꾼다. 노벨 과학상은 경이로운 과학 지식의 발견 이상으로 그 지식이 가져다 준 쓸모있는 도구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최고의 연구만 할 배짱 큰 과학자 필요

이제 다시 ‘우리는 뭘 해야 하나’를 묻는 시간이다. 마침 대통령이 직접 나서 과학자들에게 연구할 맛 나는 환경을 만들겠다 약속했다. 그 동안 실패가 너무 없었다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까지 했다. 우리의 과학과 공학의 역사에는 ‘최초’의 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최초가 되길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한다. 그렇다고 개발도상국 시절의 대한민국처럼 ‘빠른 추격자’ 정신이 강한 것 같지도 않다.

지난 정부의 급격한 예산 삭감 이전까지 우리 과학계의 연구 생태계는 일종의 평형 상태였다. 큰 진보도 퇴보도 없었다는 의미다. 이제 다시 정부가 나서서 도약을 주문한다. 과학자들은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마침 법정소설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존 그리샴의 글쓰기 방법에 대해 들었다. 1년 내내 독서와 사색으로 소설의 재료를 모은 뒤 연말이 되면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이야기거리 중에 가장 멋진 작품 소재가 뭔가’ 자문한 뒤 그중 최고의 소재를 골라 다음해 1월 1일부터 집필을 시작했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를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러플린 교수에게도 들었다. ‘네 아이디어 중 최고만 골라 연구해라.’ 성공의 법칙은 소설가의 세계와 물리학자의 세계를 관통하는 모양이다.

우리의 과학 연구는 그 동안 몸불리기에 바빴다. 많은 연구비를 받고 많은 대학원생을 모아 많은 일을 시켜 많은 논문을 써냈다.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연구만 골라 할 배짱을 키워야 한다. 정부는 그런 배짱 큰 과학자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야 한다.

한정훈 성균관대학교 교수 물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