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이의환 홈플러스 물품구매전단채피해자 비대위 집행위원장

홈플러스 회생계획안, 회생이 아니라 ‘책임 회피의 기술’이다

2026-01-20 17:15:41 게재
이의환

2025년 12월 29일 서울회생법원에 제출된 홈플러스의 회생계획안은 ‘회생’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묻게 한다. 회사를 살리는 제도는 동시에 채권자의 신뢰를 지키는 제도여야 한다. 그러나 이번 계획안은 그 방향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회생을 가장한 채권, 특히 유동화전단채(ABSTB)의 무력화 시도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계획안은 유동화전단채 채권에 대해 ‘원금 100% 인정’을 전면에 내세운다. 하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변제기 유예, 이자율 0%, 그리고 성사 여부조차 불확실한 장래 M&A를 사실상 전제로 삼고 있다. 계획안에 따르면 원금이 남아 있어도, 채권의 경제적 실질 가치는 급격히 훼손된다. ‘전액 인정’이 오히려 ‘언제, 어떻게, 무엇으로 갚을지’를 흐리게 만드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과 공정성의 영역으로 이어진다. 회생계획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갚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갚을 수 있다’는 구조가 제시돼야 한다. 그러나 현재 공개된 조건만 놓고 보면, 전단채 피해자들이 체감하는 것은 회복이 아니라 유예다. 돈이 아니라 시간이 회생계획의 핵심 자산처럼 보인다는 말까지 나온다.

더 큰 문제는 유동화 전단채의 성격을 축소·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동화 전단채는 단순한 금융투자 상품이 아니다. 홈플러스가 물품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상거래 채권이 카드채권 유동화 구조를 거쳐 전환된 것이다. 즉 회사의 영업활동과 운영자금 조달 구조에 직결된 채권이다. 그럼에도 회생계획안은 이를 일반 금융채권과 동일한 틀에 넣어 가장 불리한 변제 구간으로 밀어 넣었다. 법적으로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거래의 실질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더구나 2025년 3월 21일 ‘상거래채권으로 분류하겠다’는 취지의 약속이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번 회생계획안은 신뢰의 문제까지 건드린다. 회생은 법정 절차이지만, 그 기반은 결국 약속의 이행과 사회적 신뢰다. 신뢰가 무너지면 회생의 설득력도 함께 무너진다.

이 회생계획안이 특히 위험한 이유는 형사적 쟁점과 분리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만약 회사가 실질적인 변제 의지나 실행 가능한 회복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면, 왜 유동화 전단채 발행 구조를 유지하며 자금 조달이 계속됐는지에 대한 의문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회생계획안 자체가 오히려 ‘알고도 위험을 축소한 채 유통이 지속된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강화할 가능성도 있다.

회생은 기업을 살리기 위한 제도이지, 책임을 시간 속에 묻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회생 절차가 형사적 책임이나 투자자 기망 의혹을 덮어주는 방패가 될 수 없다. 피해자들은 투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위험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안정적 상품’으로 오인될 수 있는 구조 속에 편입됐다. 그 결과는 개인의 손실을 넘어 시장 신뢰의 붕괴로 이어졌다.

특히 DIP(회생절차 중 신규자금) 대출 방식은 근본적 회생 대책이 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구조적 위험이 크다. 당장 운영자금 수혈이 필요하다는 현실 자체는 유동화 전단채 투자자들 역시 일정 부분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주주의 실질적 현금 투입, 예컨대 사재 출연이나 주주대여금 등 자본성 자금이 결여된 채 DIP 대출에 의존하는 방식은 남은 자산가치를 담보로 추가 차입을 하는 구조로 귀결되기 쉽다. DIP 자금은 공익채권에 준하는 최우선변제 성격을 갖는 재원이기 때문에 회생이 실패하거나 청산으로 방향이 바뀔 때 그 부담이 후순위 채권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담보 구조가 특정 점포 자산의 후순위 권리 형태로 설정되는 방식이 논의될수록, 피해자 입장에서는 ‘운영자금 조달’이 곧 ‘우선순위 채권의 확대’로 이어지는지 여부를 엄격히 따져볼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형식적 합법성이 아니라 실질적 정의다. 법원과 감독 당국은 이번 회생계획안을 “법적으로 가능한가”라는 질문에만 가둬서는 안 된다. 이 계획이 과연 공정한가, 책임 있는가, 그리고 다시는 같은 피해를 반복하지 않게 만드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회생이라는 이름 아래 책임을 유예하는 관행은 결국 시장 전체로 확산될 것이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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