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소송 막힌 한국…피해구제는 개인 몫
국회 집단소송법 제정 추진 … 법무부 “전면 확대 수용”
소급 적용·옵트아웃 충돌 … 피해구제 방식 전환 갈림길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이 잇따르면서 집단소송법 도입 논의가 다시 불붙고 있다. 수천만명 피해에도 보상은 개인 소송에 묶여 사실상 작동하기 어렵다는 지적 속에 ‘집단 피해·개인 구제’ 구조가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국회가 관련 법안 10여건을 동시에 심사하면서 제도 전환 여부가 분수령에 놓였다.
16일 국회와 소비자단체 등에 따르면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과 금융상품 피해, 플랫폼 거래 분쟁 등 집단적 피해는 반복돼 왔지만 실질적인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실제 약 3370만명 규모로 알려진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서도 피해자 일부만 소송에 참여하는 구조 속에 집단적 구제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가 드러났다. 피해자는 소송 비용과 시간 부담을 감당해야 하고, 일부가 승소하더라도 전체 피해로 확장되지 않는 구조다. 이 때문에 상당수가 권리 구제를 포기하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 8일 법안심사소위원회에 집단소송법 제정안 13건을 일괄 상정하고 본격 심사에 착수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박균택 의원안을 중심으로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집단 피해·개인 구제’ 불균형 = 집단소송은 다수 피해자 중 일부가 대표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할 경우 판결 효력이 전체 피해자에게 미치는 제도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2005년 도입된 증권 분야에 한해 제한적으로만 운영되고 있어 소비자 피해 전반을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같은 구조는 ‘집단 피해·개인 구제’라는 불균형을 낳는다. 피해는 광범위하게 발생하지만 책임을 묻는 절차는 개인에게 맡겨지면서 실제 배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피해는 나뉘고 책임은 분산되면서 구제는 제한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자동차 결함과 화재, 배출가스 조작, 개인정보 유출 등 대규모 소비자 피해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해 왔다는 점도 집단소송 도입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이재명정부가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계기로 집단소송제 도입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제기한 이후 논의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법무부도 최근 집단소송법 제정안에 대해 “집단적 권리구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며 적용 범위를 손해배상 전반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수용한다는 의견을 냈다. 정부가 전면 확대에 동의하면서 장기 표류하던 입법 논의가 전환점을 맞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선진국들은 이미 도입 = 소비자·시민사회단체들도 집단소송법 도입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이들 단체는 “대규모 피해가 반복되고 있음에도 피해자가 개별적으로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 구조에서는 실질적인 구제가 어렵다”며 제도 도입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해외 주요국에서는 이미 집단소송이 소비자 피해 구제의 기본 장치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대표적인 옵트아웃 방식 국가로, 일부 피해자만 소송에 참여해도 전체 피해자에게 판결 효력이 미친다. 유럽연합(EU)도 소비자 단체를 중심으로 집단적 권리구제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대부분이 유사 제도를 운영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적용 범위가 제한적인 국가에 속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입법 논의의 핵심 쟁점은 적용 범위와 소급 적용 여부다. 박균택 의원안은 부칙에 ‘법 시행 이전에 생긴 사유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에도 적용’하도록 규정해 소급 적용을 명시했다. 제도 도입 시점에 따라 피해 구제 여부가 달라지는 문제를 해소하겠다는 취지다.
법안에는 집단소송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도 포함됐다.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에게도 판결 효력이 미치는 ‘옵트아웃’ 방식이 도입되고, 개인정보 사건의 경우 입증 책임을 완화하거나 전환하는 규정도 담겼다. 기업이 보유한 자료 확보를 위한 소송 전 증거조사 제도도 포함됐다.
또 개인정보·전자상거래 사건의 경우 소송 허가 여부를 일정 기간 내에 결정하도록 하는 등 절차를 신속화하는 방안도 담겼다. 집단적 피해 구제를 지연시키는 요인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기업부담’ 논리로 반발 = 반면 기업 부담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첨예하다. 소급 적용이 포함될 경우 이미 발생한 개인정보 유출 사건까지 집단소송 대상이 될 수 있어 통신사 등 대규모 개인정보를 보유한 기업이 영향권에 들어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계는 소송 남발 우려와 경영 위축 가능성, 법적 안정성 훼손 등을 이유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법원행정처는 “이미 진행 중이거나 종결된 사건과의 관계에서 분쟁이 심화될 수 있다”며 신중 검토 의견을 제시했다. 옵트아웃 방식에 대해서도 피해자가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송에 포함될 가능성을 지적하며 재판청구권 침해 우려를 제기했다.
그럼에도 소비자 피해 구제 관점에서는 제도 도입 필요성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행 구조에서는 기업의 책임을 실질적으로 묻기 어렵고, 피해자가 감당해야 할 비용과 부담이 과도하게 크기 때문이다.
디지털 플랫폼과 인공지능(AI) 기반 서비스 확산으로 제품과 서비스의 유통 범위가 빠르게 확대되면서 대규모 소비자 피해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는 점도 제도 도입 필요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결국 이번 논의는 집단 피해를 개인에게 맡겨온 구조를 바꿀 것인지의 문제다. 제도를 바꾸지 않는 한 대규모 피해와 제한적 구제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집단소송법 도입 여부는 소비자 권리 보호 체계를 좌우할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