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세권’이 뜬다…주거선택 기준 변화

2026-04-23 09:33:19 게재

경기연구원, 보행생활권 분석

‘편의시설’ 중시 4년 새 급증

공급중심 도시정책 전환 필요

퇴근 후 슬리퍼를 신고 편의점에 들러 야식을 사고 근처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쳐 놓고 여유를 즐기는 일상이 주거 선택의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경기연구원은 23일 ‘역세권? 아니 슬세권!: 일상이 완결되는 보행 생활권’이란 보고서를 통해 ‘슬세권(슬리퍼 생활권)’으로 불리는 보행 생활권의 중요성을 분석하고 도민 삶의질 상향을 위한 새로운 도시조성 방향을 제시했다.

경기도민의 거주지 선택 시 고려할 점(단위: %)
2021~2025년 경기도 사회조사 통계를 바탕으로 연구진 재작성.
경기도민의 거주지 선택 시 고려할 점(단위: %) * 2021~2025년 경기도 사회조사 통계를 바탕으로 연구진 재작성.

‘슬세권’은 편안한 차림으로 카페 편의점 병원 등 일상에 필요한 시설을 걸어서 10분(약 500m) 안에 누릴 수 있는 주거지역을 뜻하는 신조어다.

연구원은 “최근 4년 간 경기도 사회조사 결과를 보면 도민들의 집 고르는 기준이 ‘지하철역’ 중심에서 ‘동네 환경’ 중심으로 급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2025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거주지 선택 기준으로 ‘편의시설’을 꼽은 비율은 18.2%로, 2021년(13.5%)보다 4.7%p 높아졌다. 출퇴근의 편리함만큼이나 퇴근 후 동네에서 누리는 일상의 가치를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도내 1인가구 비중이 30%를 넘어서고 청년 가구의 절반 이상이 혼자 살고 있다는 점도 이런 추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에게는 좁은 방을 대신해 줄 동네 카페나 편의점은 단순한 상점을 넘어 일상을 유지하는 ‘공유 거실’과 같은 필수 공간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연구원이 경기도 전역을 500m 격자 단위로 나눠 분석한 결과, 슬세권의 혜택을 골고루 누리는 ‘슬세권 명당’은 수원시(83.1%) 부천시(80.7%) 안양시(75.8%)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경기도 전체 인구 거주지역의 약 70%는 아직 생활 편의시설이 더 필요한 취약지역으로 분류됐다.

실제 ‘슬세원 명당’ 지역의 전월세 거래 발생 비율이 88.5%로 취약지역(5.5%)보다 무려 16배나 활발했다. 이는 도민들이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동네를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구원은 이러한 수요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정책 대안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우선 슬세권 지수가 낮은 지역을 ‘생활권 집중 개선지구’로 지정해 보행도로 가로등 같은 환경을 정비해 ‘걷고 싶은 거리’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공공이 나서 빈 상가의 임대료를 보조하거나 리모델링을 지원, 청년들이 필요로 하는 생활편의시설로 바꾸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민간 상권이 형성되기 어려운 지역에는 공공이 직접 ‘생활서비스 패키지’를 제공하는 모델도 제시했다. 마을 주민센터 등에 공유세탁기나 건조시설을 설치하고 편의점이 먼 동네에는 무인택배함이나 생활물품 픽업거점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병원이나 약국이 부족한 곳엔 일정시간마다 순환하는 ‘이동형 의료서비스’를 도입해 누구나 보편적인 일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자는 구상도 내놨다.

김희재 경기연구원 연구위원은 “이제 도시 정책을 커다란 시설을 짓는 공급 중심에서 도민들이 일상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생활환경조성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공공이 민간시설이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면 어디서나 슬리퍼를 신고 나가 일상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걸어서 누리는 경기도’가 완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곽태영 기자 tykwa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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