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호주·이탈리아와 ‘을의 협상력’ 공조
글로벌 경쟁법 집행 ‘보폭’ 확대
마닐라 ICN 연차총회서 양자협의
공정거래위원회가 세계 경쟁당국 수장들이 집결한 마닐라에서 호주, 이탈리아와 잇따라 양자 회담을 열었다. 양자회담에서는 ‘을의 협상력 강화’와 ‘법 집행 실효성 제고’를 위한 국제 공조 강화에 주력했다. 이는 국내에서 추진 중인 플랫폼 규제와 재벌 지배구조 개선 논의를 글로벌 스탠다드와 결합하려는 전략적 행보로 풀이된다.
◆호주와 ‘을의 협상력 제고방안’ 논의 = 8일 공정위에 따르면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전날(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지나 카스-고틀립(Gina Cass-Gottlieb) 호주 경쟁소비자위원회(ACCC) 위원장과 만났다. 양측은 갑을 간 힘의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한 제도개선 방향을 집중 논의했다.
주 위원장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대기업에 대항해 실질적인 협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추진 중인 ‘단체협상 제도 개선’ 방안을 소개했다. 특히 중소기업 단체가 공동으로 협상에 나설 때 이를 담합 규제 대상에서 제외해 주는 방안이 핵심이다.
호주 ACCC는 이미 시행 중인 ‘단체협상 일괄면제(Class Exemption)’ 제도의 운영 경험을 공유했다. 호주는 연 매출 1000만 호주달러 미만 소기업 등이 단체협상을 할 경우 별도 승인 없이도 경쟁법 적용을 면제해 준다. 주 위원장은 “호주의 앞선 사례를 참고해 한국 실정에 맞는 ‘을의 협상력 강화’ 모델을 정교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탈리아와 ‘매운맛 과징금’ 논의 = 이어 이탈리아 경쟁당국(AGCM)과 양자 협의도 이어졌다. 주 위원장과 엘리자베타 이오사(Elisabetta Iossa) 위원장 대행은 법 위반 행위에 대한 억지력을 높이기 위한 제재 수단의 실효성 강화 방안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공정위는 반복적 법 위반에 대한 과징금 가중 비율 상향과 사건 처리 기간을 15개월에서 8개월로 단축하기 위한 조직 개편안을 설명했다. 이탈리아 측은 시장 지배력 남용 등에 대한 강력한 경제적 제재가 시장 자정 기능을 어떻게 회복시키는지에 대한 사례를 전달했다.
양측은 특히 디지털 플랫폼의 독과점과 착취적 관행이 국경을 넘어 발생한다는 점에 공감했다. 조사 불응 행위에 대한 강력한 제재 도입 등 경쟁당국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강화해야 한다는 데에도 뜻을 모았다.
이번 양자 협의는 주 위원장이 ICN 전체회의에서 발표한 ‘한국 경제의 당면 과제’를 구체적인 실행 계획으로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주 위원장은 앞서 “대기업 내부거래가 GDP의 31%에 달하는 한국적 특수성을 해결하기 위해 지배구조 개선과 경제력 집중 완화가 필수적”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공정위는 호주·이탈리아와의 협의를 통해 △한국형 증거개시제도(K-Discovery) 도입 △소비자 집단 손해배상 청구제 △플랫폼 정산대금 보호 등 현재 추진 중인 주요 정책에 대한 국제적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특히 호주와는 플랫폼 사업자의 대금 지급 지연과 광고비 전가 등 디지털 경제의 고질적 문제에 대해 향후 지속적으로 정보를 교환하기로 했다. 이는 국내 입법 과정에서 글로벌 규제 트렌드를 반영하는 근거가 될 전망이다.
◆“해외 경쟁당국과 공조 강화” = 주 위원장은 연쇄회담 이후 기자들을 만나 “다자 협력뿐만 아니라 주요국과의 양자협력을 통해 공정위의 정책적 기여를 확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단순한 정보 교류를 넘어, 실제 법 집행 과정에서 해외 당국과의 공조 체계를 공고히 하겠다는 의지다.
공정위는 이번 ICN 연차총회와 양자 협의 결과를 바탕으로 하반기 중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 입법 지원과 ‘공정거래분쟁조정법’ 제정에 속도를 낼 방침이다. 또 필리핀 경쟁당국(PCC)과도 경쟁법 집행 협력 강화를 위한 MOU를 체결하며 동남아시아 지역으로까지 협력의 지평을 넓혔다.
전문가들은 이번 공정위의 행보가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 시 마주할 수 있는 경쟁법 리스크를 줄이는 데도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해외 현지에서 우리 기업들이 겪는 불공정 행위 조사 시에도 이번에 구축한 양자 공조 체계가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주 위원장은 ICN연차총회 마지막날인 8일 오후에는 현지 한국 기업인들을 만나 애로사항을 듣고 해외진출 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방안도 모색한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