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구시대적 절약에서 인공지능 에너지 관리로
금년 여름 전력 공급 예비율 30%를 넘나드는 상황이 지속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정말 다행이다. 한편으로는 산업용 전력수요가 줄어서 그러는 것 아닌지 걱정도 된다.
현대적 안보의 분야는 군사안보 에너지안보 사이버안보에 그치지 않는다. 그 중에 핵심은 인간 건강과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안보’이다. 기후위기 시대이기 때문에 인간 삶의 기본적 쾌적함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안보는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환경에서 최적의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쾌적한 환경을 유지할 능력은 미래 국가의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공공기관의 여름 풍경은 말문이 막힌다. 단열 성능을 높이기 위해 창문을 ‘게딱지’처럼 작게 만들어 놓고는 냉방을 못 하게 한다. 외기를 들여와 탁한 기운이나마 없애자고 창문을 연 채 선풍기를 돌리는 모습이 과연 아름다운가?
에너지 효율을 위한 건축 설계와 에너지절약을 위한 운영 방침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 역설적인 현실이 공공기관을 진짜 불편한 일터로 만들어, 우수 인재들의 공직 기피를 부추기고 있으니 이게 우리가 할 일인가?
인공지능 활용, 생각 틀부터 바꿔야
일본은 쿨비즈 프로그램을 통해 냉방 부담을 줄이지만, 폭염 때는 에어컨 사용을 권장한다. 미국은 온도 습도 기류 복사열까지 고려한 ‘열적 쾌적성’을 기준으로 관리한다. 유럽은 2022년 폭염 이후 “적절한 냉방은 국민의 권리”라고 선언하였다. 반면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냉난방 기술과 인공지능 역량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구시대적 잣대에 갇혀 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전년 대비 에너지 절감 몇 퍼센트’라는 목표를 제시하고는 이를 기준으로 기관 경영성과를 평가한다. 전기화 추세와 각종 에너지 사용 기기 증가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총량 감소만을 강요하는 이 기막힌 현실을 언제까지 외면하고 감수할 것인가?
그렇다면 공공기관 직원들을 쥐어짜서 거둔 에너지절약 성과가 과연 얼마나 될까? 발전설비 건설 수요를 줄였나? 전력망 건설 수요를 줄였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생산성 저하로 인해 버려진 기회비용이 더 클 수도 있다. 더위에 지친 공무원의 업무 효율 감소, 잦은 휴식과 컨디션 난조로 인한 서비스 질 하락, 나아가 우수 인재의 민간 이직 증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냉방 정책에 근본적 발상 전환이 절실하다. 감기 걸릴 정도로 시원하게 냉방을 하자는 것이 아님을 알지 않는가? 생각의 틀을 바꾸자.
첫째, 공공기관 에너지절약성과 평가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전력 사용 총량 감소라는 비현실적 목표 대신 원단위 개선, 즉 단위 면적당·인원당 효율성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냉방도일(CDD, Cooling Degree Days)을 고려한 기후 보정 지표, 건물 노후도와 용도를 반영한 맞춤형 지표 등 다양한 측정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인공지능 기반 개별·구역별 냉방 제어시스템으로 과잉·부족 냉방 문제를 해결하고 스마트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 △실시간 온도 △습도 △재실률을 확인해 자동으로 최적 환경을 유지하는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 기술을 개발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개발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제 굴비 좀 먹읍시다
다행히 정부는 2030년까지 공공건물을 인간안보형 스마트 에너지 관리 체계로 전환하는 로드맵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와 산업통상자원부의 인공지능 기반 에너지관리시스템 시범사업, 서울시의 에너지사용량 총량제 도입 등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무조건 끄고, 무조건 참자는 절약을 넘어 근로자의 건강 보호와 쾌적한 노동환경 제공이라는 인간안보 실현에 대한 인식이라 생각되어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정책 효과는 에너지 관련 수치로만 계산되지 않는다. 근로자들의 불편함을 대가로 얻는 미미한 절약 효과와 그로 인한 생산성 저하, 인재 유출 등 숨겨진 사회적 비용을 종합적으로 따져볼 때 현행 정책은 결코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최고의 에너지안보는 인간안보(人間安保)다.
지독하게 가난하고 하루하루가 전쟁과 같던 시절에 쓰던 에너지절약은 이제 더 이상 에너지안보 정책으로 유효하지 않다. 아버지가 애써서 벌어온 돈으로 맛있는 굴비를 사 오는 형편이 되었고, 각각 한 마리씩 먹어도 될 만큼 많이도 사 오게 되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굴비 좀 먹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