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93세 ‘정년이’를 만났다
지난해 말 큰 인기를 끌었던 텔레비전 연속극이 있다. 여성국극이라는 낯선 분야에서 최고에 도전하는 ‘소리 천재’를 둘러싼 경쟁과 연대 성장기를 담은 ‘정년이’다. 주인공 이름을 딴 연속극은 한때 여성국극에 지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정도로 화제가 됐다.
그 ‘정년이’였다.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아니라 실제 이야기 속 주인공인 인간문화재 조영숙 명인이다. 조몽실 판소리 명창의 외동딸인 명인은 여성국극 배우로 출발해 70여년동안 무대를 누벼 왔다. 고 이동안 명인 수제자로 오랜 전수조교 생활을 거쳐 지난 2012년 국가무형유산 발탈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구순을 넘긴 현재까지 발탈 원형을 지키며 매년 무대에 올라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추석 연휴 직후 우연히 무대를 접했다. 연속극에서 흘깃 봤던 발랄한 청춘은 아니었지만 명인은 흥겨운 몸짓과 재담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한쪽 발에 탈 즉 가면을 씌운 연희와 함께 ‘춘향전’ 가운데 이도령과 나무꾼이 등장하는 ‘나무꾼막’에 발탈을 엮은 공연이 이어졌다.
명인을 이을 전승교육사 이수자 전수자에 장구 피리 아쟁 반주까지 공연의 품격을 높였다. 반면 객석 현황은 아쉬웠다. 추석 연휴가 끝난 직후 공연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빈 좌석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국가유산청과 국가유산진흥원이 함께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서울 자치구와 산하 문화원 후원만으로는 부족했나 싶었다.
하지만 정작 명인과 이수자 등은 관객의 많고 적음을 떠나 열정을 다했다. 오히려 “지역이 잘되라는 바람을 공연에 담지 못했다”며 미안해했다. 그간 지자체 차원에서 관객이 이미 확보된 축제 등 여러 행사에 발탈 공연과 명인을 연계하려는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멀리 경기도에서까지 아이들 손을 붙들고 걸음을 한 관객들도 힘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영화 음식 등 우리 문화가 세계인들에게 크게 호응받고 있는 요즘이다. 명인과 제자들처럼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다양한 흐름과 시도가 씨줄 날줄로 엮이고 발전을 거듭해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구순이 넘은 나이에 매년 전통의 끈을 놓지 않는 명인과 뒤를 잇는 이수자 등에게 감사하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지역에 연고를 둔 명인을 위해 크고 작은 무대를 주선해 온 지자체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지자체는 명인의 공연을 놓친 시민들을 위해 또다른 선물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명인을 비롯해 지역에 연고를 둔 국가무형유산 예능보유자들이 함께하는 무대다. 이생강(죽향대금산조원형보존회 이사장) 명인의 대금산조에 정옥순(향사가야금병창보존회 이사장) 명인의 가야금병창 및 산조까지 어우러진 무대라니…. 전국 지자체 243곳이 이같은 노력을 함께한다면 케이(K)-문화는 또 얼마나 풍성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