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란, 전후 질서 재설계 놓고 ‘기싸움’
이란 종전청구서에 트럼프 “원하면 전화해”
이스라엘-레바논 무력충돌 재점화도 변수
미국과 이란의 종전협상이 다시 짙은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란은 중재국 파키스탄을 하루 만에 다시 찾아 구체적인 종전 조건을 전달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협상을 원하면 전화하라”며 원격협상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스라엘과 레바논 국경에서는 휴전이 흔들리며 무력충돌이 재개돼 중동 전체가 다시 긴장 국면으로 치닫는 양상이다.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은 26일(현지시간) 오만 방문 직후 다시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로 이동해 군부 및 정부 핵심 인사들과 회동했다. 이란 관영매체들에 따르면 이번 일정은 단순 외교 방문이 아니라 파키스탄을 통해 이란의 요구안을 미국 측에 명확히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란이 제시한 조건은 △호르무즈 해협의 새로운 법적 체제 수립 △전쟁 피해 배상금 지급 △재침략 금지 보장 △이란에 대한 해상 봉쇄 해제 등이다. 전후 안보·경제 질서까지 포함한 포괄 합의를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 문제는 향후 미국 해군의 작전 자유와 세계 원유 수송망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이란측은 “현재 논의는 최근 군사적 갈등 종식 조건에 집중돼 있으며 핵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미국이 핵 개발 중단을 협상의 핵심 전제로 삼는 것과는 분명한 시각차다.
트럼프 대통령은 26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사람들을 18시간씩 이동시켜 보낼 필요가 없다. 원하면 우리에게 전화하면 된다”고 말했다. 당초 미국은 파키스탄에서 후속 협상을 위해 대표단 파견을 검토했지만 이란 측의 미온적 태도가 감지되자 이를 보류한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화협상’ 발언은 협상 방식의 변화라기보다 미국이 협상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압박 메시지로 해석된다. 그는 “우리는 모든 카드를 쥐고 있다”고도 말했다. 협상이 결렬돼도 미국이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인식을 강조한 셈이다.동시에 그는 “그들은 핵무기를 가질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만날 이유가 없다”고 못 박았다. 핵 문제를 배제하려는 이란과 정면충돌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협상 주도권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격화하고 있다. 미국은 군사적 우위를 앞세워 핵 포기를 압박하고, 이란은 전쟁 배상과 해상 질서 재편까지 요구하며 의제를 넓히고 있다. 종전협상이 전후 질서 재설계 국면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평가다.
또 다른 변수는 레바논 전선이다.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사이의 휴전은 사실상 무너지는 분위기다. 레바논 국영 매체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남부 지역에 공습을 가했고,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군을 겨냥한 자폭 드론 공격으로 맞섰다. 양측은 서로 상대가 먼저 휴전을 깼다고 주장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즉각적 위협뿐 아니라 잠재적 위협까지 선제 차단하겠다”며 추가 군사작전을 예고했다. 헤즈볼라도 이스라엘의 영토 점령과 주권 침해가 계속된다면 대응 수위를 높이겠다고 경고했다. 레바논 전선의 재점화는 미-이란 협상에도 부담이다.
여기에 러시아 변수까지 더해지고 있다. 아라그치 장관은 파키스탄과 오만 방문 뒤 모스크바로 이동해 27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회동할 예정이다. 이란은 러시아 측과 종전 협상 상황, 휴전 상태, 주변 정세 변화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파키스탄은 중재자, 오만은 외교 채널, 러시아는 전략 후견인으로 움직이며 종전협상이 다자외교전으로 번지고 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