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분노 "TK 버렸다" … 정치인 반발, 시민들은 차분
환영 예행연습 하다 눈물
"MB 이어 박근혜도 배신"
21일 오후 2시 대구시 동구 신천3동 대구상공회의소 10층 회의실에 남부권신공항 범시도민추진위원회 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40여명의 회원들은 내심 영남권 신공항이 밀양으로 확정될 것으로 보고 일종의 '환영 예행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원칙과 신뢰를 강조해온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약속한 공약인 만큼 신공항 입지를 밀양으로 확정할 것이라 믿었다. 밀양이 아니라면 최소한 가덕도로라도 정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들은 1시간쯤 뒤 밀양도 가덕도도 아닌 난데없는 '김해공항 확장'이 발표되자 허탈감을 넘어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 "정부는 대사기극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구·경북을 버렸다" "이 정부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등 험한 말들이 쏟아졌다. 강주열 추진위원장은 "이명박정부에 이어 박근혜정부마저 대국민 사기극을 벌여 참담한 심정"이라며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영남권 5개 시·도지사의 약속을 강조하며 신공항 유치전을 자제했던 권영진 대구시장은 이날 오후 4시 기자회견을 열어 '어처구니' '황당' '충격' '분노' 등의 단어를 써가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권 시장은 "정부의 결정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10년 전으로 거꾸로 돌려놓은 어처구니없는 결정이고 충격적이고 황당하다"며 "이 정부마저도 신공항 건설을 또다시 백지화시켜 유감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앞으로 이번 용역 과정과 내용에 대해서 철저히 검증하고 영남권 시·도민들의 의견을 다시 수렴하는 등 부산을 포함한 5개 시·도가 함께 머리를 맞대 대응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김관용 경북지사는 발언수위를 낮췄다. 김 지사는 별도의 성명이나 기자회견을 하지 않고 "유갑스럽다"는 입장만 대변인을 통해 밝혔다. 김기현 울산시장도 "신공항의 꿈이 원하는 방향으로 실현되지 못해 유감스럽지만 어쨌든 국토교통부의 발표는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과연 김해공항 확장이 가능한 것인지, 또 이번 용역과정과 평가내용에서 타당성을 상실한 것이 없는지 등 용역결과를 더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영남권 주민들의 실망감은 컸다. 박 모(51·대구 북구)씨는 "몇 년 동안 돈만 날렸다. 김해공항 확장이 안 된다고 해서 신공항 논의를 한 것으로 아는데 이해할 수 없다"며 "뭐 하나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임 모(48·대구 수성구)씨는 "대구·경북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에게 몰표를 주고도 정권 후반기에 두 번이나 배신을 당한 꼴"이라고 꼬집었다.
정부에 대한 이 같은 민심이반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홍 철 대구가톨릭대 총장은 "김해공항 확장은 정부가 수차에 걸쳐 불가능하다고 했기에 신공항 건설이 이슈가 된 것"이라며 "국민을 존중하고 국민 Q에 정직해지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덕률 대구대 총장도 "(정부가) 신뢰를 너무 가벼이 여기는 것 같아 안타깝고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한편 대구·경북 지방신문인 '매일신문'은 22일자 1면을 신공항 백지화를 규탄하는 뜻으로 백지로 발행했다. 이 신문은 1면에 기사와 광고를 싣지 않고 '신공항 백지화, 정부는 지방을 버렸다'라는 제목만 보도했다.
대구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시민-정치권 반응 온도차 확연
"최악(밀양) 결정 아니라 다행"
부산의 김해공항 확장안에 대한 반응은 온도차가 현격했다. 서병수 부산시장과 정치권은 정부의 김해공항 확장안에 대해 "백지화나 다름없는 결정"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김해공항이 어때서"라며 차분한 모습이다.
21일 오후 부산시청 인근 거제시장에서 만난 상인 정순례(56·연제구)씨는 "밀양으로 안 간 것만 해도 다행"이라며 "솔직히 가덕도보다는 김해가 더 가깝고 편리하지 않냐"고 말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자영업자 이장연(51·해운대구)씨는 "김해는 안 된다고 하더니 이제는 확장해도 된다고 하니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며 "안전만 담보된다면 굳이 갈등을 부추기며 가덕도니 밀양이니 따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거제시장은 시청 바로 옆이라 공무원들의 이야기가 비교적 쉽게 전달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정부의 입지선정 발표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상공계, 시민단체, 정치인들의 반응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오히려 서병수 부산시장의 거취에 대한 문제가 안주거리였다. 김 모(39·동래구)씨는 "가덕도 신공항이 안 되면 사퇴한다더니 그 말을 지켜야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옆자리에 앉은 정 모(40·연제구)씨는 "정치인 말 한 두 번 속은 것도 아니고 밀양으로 안 갔으니 설마 사퇴까지 하겠냐"고 말했다.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라는 회사원 장민규(37·부산진구)씨는 "인천에서 비행기를 탈 때는 멀고 시간이 많이 걸려 불편한게 사실"이라면서도 "김해공항의 중장거리 노선을 확충하고 내항기를 이용해 인천까지 접근성을 확보해 준다면 신공항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배병찬(41·수영구)씨는 "없는 나라 살림에 10조원씩 들여 새로운 공항을 짓는 것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반면 신공항에 정치적 생명을 건 서병수 시장은 즉각 반발했다. 서 시장은 21일 정부의 용역결과 발표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김해공항 확장안은 절대 받아 들일 수 없으며 가덕 신공항 건설을 계속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해 사실상 확장안을 거부했다.
서 시장은 "김해공항 확장안은 눈앞에 닥친 지역 갈등을 피하고 보자는 미봉책"이라며 "20년 넘는 시민 염원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편협한 수도권의 논리에 따른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부산시는 시민들에게 약속한 안전하고 24시간 운영할 수 있는 공항을 만들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겠다"며 "정부의 용역결과 발표에 대한 세부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뒤 독자적 대응 방안을 포함해 입장을 정리해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부산 국회의원 5명도 불수용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21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가덕도 신공항 재추진'을 의결했다. 이들은 총선 직전 문재인 전 대표와 함께 "부산에서 5명의 국회의원만 당선시켜 준다면 현 정부 임기내 신공항 착공을 이루겠다"고 장담한 바 있다.
시민 사회는 앞으로 민자유치 방안을 포함해 가덕 신공항 추진을 위해 전방위로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박인호 가덕신공항 범시민운동본부 공동대표는 "김해공항이 포화상태이고 안전하지 못해 가덕도 신공항을 건설을 추진했는데 확장안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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