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비정상 건설산업 (6) 엉터리 직접시공 의무제
'브로커' 전락한 건설사 … 정부, 반쪽짜리 법조차 '나몰라라'
해외선진국은 직접시공이 '상식' … 국내 직접시공 의무화 조항, 첫단추부터 잘못 꿰
H씨는 국토교통부 산하 익산지방국토관리청이 턴키방식으로 발주한 국도건설공사의 하청업체 C사로부터 가시설공사를 재하청 받았다. 현행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재하도급'이다.
그는 공사 초기 C사와 시공약정을 맺고 공사를 시작했지만, 설계부실로 가시설공사 단계에서 추가공사와 공사지연이 발생했다. C사는 H씨에게 공사비 일부를 반영했지만, H씨가 들인 돈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H씨는 발주청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담당공무원들은 C사가 H씨에게 공사대금을 모두 지급했다고 결론내렸다. 발주청 공무원들은 사실관계를 조사 과정에서 C사의 불법재하도급 행위를 인지했음에도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불법 재하도급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아랫단계로 고스란히 집중된 셈다. 지난해부터 H씨는 C사와 공사대금을 둘러싼 소송을 진행중이다.
◆한국 원청 건설사들은 '브로커' = 우리나라 건설산업은 직접시공이 아닌 하도급을 당연시하고 있다.
'건설공사의 하도급을 제한'하는 건설산업기본법 조항이 있지만 원청업체가 수주한 공사를 1개 업체에게 몰아주는 이른바 '일괄하도급'에 대해서만 영업정지나 과징금의 행정처분을 내릴 뿐이다. 수주한 공사를 2개 이상의 하청업체에게 나눠주면 아무 상관이 없다.
이 법에 따라 원청업체는 현장을 관리할 직원만 채용하면 얼마든지 수주를 할 수 있고, 수주한 공사는 철저하게 가격경쟁시켜 하청업체를 선정한다.
자연스럽게 이들의 목적은 건물을 잘 짓기보다 하청을 옭아매 자신들의 이득을 최대화시키는 데 집중된다.
이런 행태는 원청업체의 규모를 떠나 관행화돼 있다. 원청들이 항상 하청방식에만 매달리다보니 국내 건설산업은 하도급문제로 시끄럽다.
미국에서는 하청 중심의 원청업체를 '브로커'로 규정한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1993년 12월경 펴낸 '적산제도 개선방안 연구 미국 전문가 활용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건설업체의 경우, 공사를 수행할 직접 노무인력을 보유하지 않으면 '브로커'로 분류하고 있다.
국내 원청업체 대부분은 자체 건설기계와 기능인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므로, 미국식으로 본다면 '브로커'이거나 적어도 건설회사가 아닌 '관리회사'에 해당한다.
◆"하도급 체질, 국제시장서 외면" = 미국, 독일 등 선진국들은 모든 건설공사에 대해 직접시공이 '상식'이다.
미국은 연방고속도로청, 뉴욕주, 미국육군공병단의 경우 계약금액의 50% 이상, 캘리포니아, 아이오와, 버지니아주 등의 경우 30% 이상을 원청이 직접시공토록 강제하고 있다.
영국은 계약금액의 60% 이상을 하도급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프랑스는 직접시공 의무비율이 70% 이상이 돼야 정부가 건축분야의 자격과 품질을 보증해준다.
독일 역시 연방정부 공공공사는 직접시공비율이 최소 30% 이상이다.
그러다보니 건설사들이 자체적으로 전문인력과 장비를 보유할 수 밖에 없다.
신영철 건설경제연구소장은 "우리나라 원청업체들이 시공관리라도 잘하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은 하청업체를 쥐어짜는 노력에 치중하게 된다"며 "작업팀과 장비를 직접 보유하지 않다보니 공정개선이나 원가절감 노력이 실제로는 하청업체에 떠넘겨지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심규범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건설산업연구실장은 "수주생산이 불가피한 건설은 제품이 아닌 업체의 실적을 판단해 믿고 맡기는 만큼 직접시공이 국제적 상식"이라며 "국내 원청들은 하청에 의존하다보니 직접시공 경험이 없어 국제시장에서 외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시공참여자제도 사라져도 부조리 여전 = 정부는 1999년 '시공참여자제도'를 도입했다가 2006년 '포스코 본사점거 사건' 이듬해 이를 폐지했다. 건설업체가 아닌 이른바 '십장' '오야지'에게도 도급을 허용하다보니 임금 및 장비비 체불이 확산돼 사회적 문제로 비화됐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재하도급의 무제한적 허용이 현장 노동자뿐만 아니라 발주자에게까지 피해를 끼친다는 교훈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교훈은 남았지만 가격경쟁 격화는 그대로였다. 체불의 주체가 하청업체로 바뀌었을 뿐이다. 2009년에도 건설노무에 대해 재하도급계약을 신설하겠다는 취지로 '건설노무제공자제도' 도입이 시도됐다가 취약계층인 일용노동자의 근로조건 및 노동기본권 보호에 부합하지 않고 산업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높다는 인권위 등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지난해 서울시는 2011~2013년 3년간 하도급 부조리 신고센터를 운영한 실적을 발표했다. 전체 883건의 신고 중, 임금체불이 30%, 자재 및 장비대금체불이 46%로서 합계가 76%이다.
하도급이 일상화된 산업구조의 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수치다. 원청업체가 직접 시공을 하지 않고 하도급에 의존하다보니 임금·장비대금 체불 등 노동자들의 피해가 하청업체를 통해 고스란히 옮아갔다는 지적이다.
◆유명무실 법 만들어놓고 관리도 안해 = 우리나라는 2004년 건설산업기본법에 직접시공 의무화 조항을 넣었으나 첫 단추를 잘못 꿴 탓에 현재까지 '반신불수' 상태다.
당시 개정된 법에 따르면 100억원 미만의 중소건설공사에 대하여만 직접시공이 의무화돼 있다. 시행령은 점입가경이다. 적용대상을 더 축소시켜 50억원 미만 공사에 대해 10% 내지 50%까지 차등 적용했다.
경실련 최승섭 부장은 "국회의원이나 정책관료들이 이를 두고 우리나라도 이미 직접시공제를 도입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너무 황당해서 당황스러운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선진외국은 공사규모를 제한하지 않고 모두 적용하는데 유독 우리는 중소규모에 해당하는 공사에만 국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소규모 공사현장의 경우에는, 발주청의 관리능력이 낮을 뿐만 아니라 원청업체도 영세하여 행정처분의 영향이 별로 크지 않다.
정부는 반쪽짜리 법 마저 시행여부를 관리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해양부는 2012년 경실련이 직접시공제 시행에 대한 평가내용을 정보공개 요청하자 '외부기관에 의한 평가를 시행한 적이 없다'고 회신했다. 경실련이 제도가 도입된 지 6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담당자는 "새로운 제도가 시행됐다고 해 정부가 반드시 평가를 해야 할 의무나 규정이 어디에 있느냐"며 되묻더라는 데 최 부장의 설명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입법부와 행정부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직접시공제를 아무런 실효성없도록 도입했을 리가 없다. 업계의 로비가 작용한 결과"라며 "정부도 엉터리 직접시공제의 도입효과가 없음을 알고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심 실장은 "선진국과 같은 직접시공제가 제대로 도입되면 불공정 하도급, 체불, 부실공사, 덤핑수주 등 국내 건설문제의 80%는 해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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