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 비정상 건설산업 (9) 고양이에 생선맡긴 '노임조사'

정부공사 임금기준 20년째 건설업계가 결정

2015-03-27 10:38:04 게재

정부, 1995년부터 시중노임 산정 건설협회에 일임 … '공사비 부풀리기' 논란

목수 경력 25년인 A씨는 하루 10시간 일하고 16만원을 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받은 일당이 9만원이었는데, 2배도 안 늘었다.

올 1월 공표된 건설노동자 시중노임(8시간 기준)은 하루 14만9959원이다. 1999년 1월(6만3608원)보다 2.3배 올랐다. 10시간으로 환산하면 19만원 정도 된다. A씨는 "노가다 현장 밥 먹은 지가 25년인데 갓 일 배울 때보다 더 먹고살기 어려워졌다"고 한숨을 쉬었다.

◆"실제 건설노임, 시중노임보다 적어" = 건설공사 노무비 산정기준인 '시중노임'이 실제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임금을 반영하지 않은 채 공사비를 부풀리는 데 쓰이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를 조사·공표하는 유일한 기관이 건설사들의 이익단체인 대한건설협회인데다 정부마저 조사는커녕 '감시자' 역할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건설협회는 매년 2회 건설현장 노동자들의 노임을 조사·발표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정해진 시중노임이 건설공사비 산정기준으로 적용된다.


올 1월 건설협회가 공표한 일반공사 직종단가(8시간 기준)는 보통인부(잡부)가 8만7000원, 형틀목공이 15만1000원, 철근공 14만원이다. 10시간 일당으로 환산하면 보통인부는 12만원, 목수 20만원, 철근공은 19만원 정도다.

노동자가 각종 보험료 등을 부담해야 하고, 퇴직금 및 연월차 등의 각종 복리후생혜택이 없다는 점, 동절기 등 비수기에는 수입이 거의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충분치 않은 돈이다.

그러나 그마저 실제 현장에서는 지급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건설노조가 현장 건설노동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내부 조사에 따르면 건설노동자 일당은 보통인부 8~9만원, 목수 15~17만원 정도로 10시간 환산일당의 8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벌이가 나은 철근공 역시 16~18만원으로 90%에 조금 못미쳤다.

건설협회는 평균노임 조사가 엄격하고 객관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건설협회 관계자는 "우리는 노동자들의 실제 급여 수령기록인 '노임대장'을 통해 노임을 조사하고 통계기법을 활용해 평균을 산출한다"며 "건설공제회를 통하거나 설문 형태로 조사를 할 경우 세금, 보험료 부담을 우려한 노동자들이 오히려 받은 돈을 줄여 응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건설노조 관계자는 "건설노동자의 4대 보험 가입률은 매우 낮다"며 "가입해도 총수입이 낮아 실제 납부할 세금이 많지 않아 일당을 속일 이유가 없다"고 반박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건설노임 산정에서 손 뗀 정부 =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건설산업의 노임기준은 2가지였다. 정부(당시 재무부)에서 고시하는 '정부노임'과 90년부터 대한건설협회가 발표하고 있는 시중노임이 그것이다.

시중노임은 노동시장에서 결정돼 건설근로자에게 실제 지급되는 돈, 정부노임은 입찰예정가격 작성 때 적용하는 노무비의 기준금액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이후부터 건설 호황이 시작, 건설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었다. 실제 임금이 가파르게 올랐고 시중노임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그러다보니 정부노임이 시중노임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격차가 점점 벌어졌다.

정부가 1990년 정부노임을 평균 20.4% 인상하고 1993년에도 25.6% 대폭 인상했지만 격차를 좁히기엔 역부족이었다.

1995년 국가계약법이 제정되고 '실적공사비 제도(이미 수행한 사업을 토대로 축적된 실적단가로 건설공사비 산정)'가 만들어졌다.


업계의 계속된 노임 현실화 요구와 실적공사비 제도의 도입으로 정부는 노임 산정에서 손을 뗐다. 대신 건설협회가 노임을 조사·공표할 권한을 독점하게 됐다.

자신들이 수주해야 할 공사의 노임기준을 건설업계가 직접 정하도록 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건설협회가 조사발표하는 시중노임은 건설공사의 설계금액을 산정하는 데 사용되지만 업체가 실제로 공사를 낙찰받아 시공하는 과정에서는 지급을 강제하는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설계변경이나 물가변동 등의 명목으로 원도급업체들의 공사비 증액에만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영철 건설경제연구소 소장은 "이익단체에게 공사비 산정기준을 맡긴 것부터 문제이지만, 이마저도 건설노동자에게는 적용시키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며 "정부가 시중노임이 실제 건설노동자에게 지급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신 소장은 "90년대는 정부노임이 실제 건설노임보다 낮다는 주장이 쇄도했지만, 현재 시중노임이 실제 건설노임과 맞지 않은 부분은 아무도 주장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 최소한 감시자 역할이라도 해야" = 건설협회에 따르면 우리나라 건설업 평균임금은 1999년 당시 6만4000원 수준이었으나, 올해는 15만원이다. 15년간 약 2.3배 올랐다.

전문가들은 노임을 현실화하고 공사비 산정을 투명화하기 위해 정부가 시중노임을 '적정노무비(적정임금)'로 못박고 이를 바탕으로 공사비를 산정토록 할 것을 제안한다.

현재 국내 건설업체는 이른바 '하향식' 입찰행태를 보이고 있다.

원청업체는 발주기관의 예정가격이 낮아도 일단 '수주가능한 금액'으로 투찰한다. 더 싼 값을 자청하는 하청업체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하청업체는 싼 공사비를 맞추기 위해 그만큼 저가의 건설노동자를 찾게 된다. 이는 결국 저가 외국인노동자 고용, 부실시공 등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적정임금을 토대로 공사비를 산정하는 '상향식' 입찰방식으로 바뀌면 이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게 제안의 핵심이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이미 시행중인 '적정임금제'가 여기에 해당한다. 미국 노동부는 직접 3년마다 전국적으로 적정임금(Prevailing Wage, PW) 조사를 실시, 이를 공공공사에 의무적용한다. '일당'으로 뭉뚱그려 적용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시간'단위로 산정한다.

발주기관이 법제화된 노임기준을 바탕으로 공사비를 산정하면, 건설사 역시 노무비를 깎을 수 없으므로 '시공 가능한' 액수로 입찰에 응할 수 밖에 없다.

심규범 건설산업연구원 실장은 "정부가 적정임금을 직접 조사하고 실제 지급까지 관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며 "여건상 무리라면 최소한 건설협회가 조사·공표한 시중노임을 적정임금으로 못박고 실제 제대로 지급되는지를 감시하는 역할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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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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